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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헌영, 그리고 조선공산당과 남로당.. 그를 알아야 대한민국이 보인다.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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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헌영, 그리고 조선공산당과 남로당.. 그를 알아야 대한민국이 보인다.

비트윈더라인 BetweenTheLines 2018.11.10 21:57



박헌영은 우리나라 최초로 공산당을

세운 인물로 유명하다. 1920년대

공산당을 만들었고, 본격적인 활동

은 해방이후부터이다. 해방이후

박헌영은 해방된 한반도에 공산정부

인 조선인민공화국을 세웠고, 초대

주석에 이승만 박사를 앉히려고

했다.




그러나 이승만 박사가 거절하면서

박헌영의 괴략은 좌절되었다.

박헌영은 상해임시정부로 시선을

돌렸다. 박헌영은 상해임시정부 

인사들에게 인민공화국을 만드는데

협조를 요청했지만, 거절당했다.




이로인해 박헌영은 임시정부를 비난

하는 성명을 발표하기에 이른다.

그는 임시정부를 망명정부라고 비난

하고 나섰다. 박헌영은 이승만과

친일파 처리 문제로 큰 갈등을 겪는다.




해방된 해 겨울, 한반도는 거대한 

물결에 휩쌓이는데, 바로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결정된 신탁통치안때문

이었다. 대부분의 국민들과 정치세력

이 반탁운동을 하는데, 처음에는

공산당도 반탁운동을 했다.






박헌영은 반탁운동을 할 당시 돌연

평양을 가서 김일성을 만나고 와서

돌연 찬탁으로 돌변했다. 이로 인해

공산당은 찬탁운동을 전개했고, 이로

인해서 국민들은 공산당에 등을

돌리게 되는데...




이듬해 3월, 미소공동위원회가 열렸

으나 소련이 반탁단체를 배제하려고

했으나 미국이 항의를 하여 결렬되고

만다.


당시 여운형과 김규식이 좌우 합작

운동을 시작했는데, 박헌영이 여기에

참여했다. 그러나 박헌영이 다시

방북을 하고 돌아와서는 좌우합작운

동을 반대했다. 박헌영은 토지몰수,

미군정 철수등 김일성이 주장하는

내용을 조건으로 내걸고 여운형을

협박했다.




이로 인해서 조봉암이 공산당을

탈퇴하고 여운형쪽으로 간다. 

좌우 대립은 극에 달했고, 46년

여름, 정판사 위조지폐 사건이

발생한다. 공산당이 지폐 인쇄기

가 있는 정판사 건물에 잠입하여

위조지폐를 만들다 미군정에

검거된 것이다.


이 사건을 계기로 미군정은 공산당

일망타진을 계획한다. 공산당계열

의 신문을 폐간하고, 공산당 지도부

척결에 나섰다. 이때 공산당은

최대 위기를 맞게 된다. 이 때 박헌영

은 대중선동을 통해서 강경투쟁을

주장했다.






박헌영은 조선공산당, 조선신민당,

조선인민당(당수 : 여운형) 3당 합당

을 추진한다. 여운형도 찬성했으나

내부에서 불만이 터졌다. 박헌영의

독단에 대한 불만이었다. 박헌영은

이에 프락치를 심어 내부 분란을

일으켜서 여운형과 상의없이

합당하여 남조선노동당을 창당하게

된다.


이에 여운형은 미군정에 박헌영의

제거를 부탁하지만 거절당한다.

여운형은 방북하여 김일성을 만났고

박헌영이 소련의 지령에 의해 움직

이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결국 여운형도 남로당 창당에 동의

했고, 초대 위원장을 맡았다.

박헌영이 부위원장을 맡았다.

얼마 후, 두 사람은 당 주도권을

두고 큰 갈등에 휘말렸다.

결국 여운형은 위원장직을 사퇴했다.


미군정은 계속해서 공산당을 색출

하기 위해 압박을 가했고, 공산당

체포령을 내렸다. 정판사 위조지폐

사건으로 인해서 미군정의 압박이

최고조에 이르자 박헌영은 총파업

투쟁을 주도하기 시작했다.




46년, 9월 23일, 부산철도노조에서

시작한 한국사 최대 총파업인 9월

총파업이 시작됐다.

파업은 전국적으로 퍼졌다. 파업은

2주일만에 소강상태가 되었고,

그 혼란을 틈타 주동자 박헌영은

관이 실린 영구차를 타고 월북해

버린다.


박헌영이 월북한 뒤에도 공산당들은

계속해서 파업을 주도했고, 대구에서

경찰 발포로 노동자가 사망했는데,

이것이 10.1 사건의 발단이 되어

시위는 전국적으로 퍼져갔다.

공산당이 선동을 하여 발생한 이

사태는 너무나 걷잡을 수 없게

되자, 공산당은 통제력을 잃게 된다.




이로 인해서 결국 공산당은 대중적

지지를 상실하게 되고, 특히 대구 경북

지역에서의 민심이반이 가장 심하게

됐다. 그래서 이 지역이 전통적인

보수지역이 된 것이다. 


여운형은 이때 정계은퇴를 선언하고

남로당을 탈퇴하지만, 미소공동위원회

가 다시 재개될 조짐이 보이자

다시 좌우합작운동을 재개한다.

여운형은 미소공동위원회가 잘 되면

통일임시정부가 수립될 것으로 생각

했으나... 47년 7월 여운형은 암살당

한다. 


당시 남로당에서 수차례 테러 협박

이 있었고, 월북한 박헌영은 김일성

에게 여운형을 계속적으로 비판했다.

여운형 암살을 누가 했는지는 아직

정확히 밣혀지지는 않았다.


박헌영은 수시로 남과 북을 오가며

남로당과 교류했다. 그리고 남북협상

에서 북측대표로 참여했다.

원래 북한 공산당은 박헌영이 남쪽에

세운 조선공산당의 분국이었다.

박헌영이 조선공산당의 최고위치였

으나, 월북하면서 김일성 밑으로

들어가는 처지가 되었다.






 박헌영은 월북하면서 남로당 당원

만명정도를 데리고 간것으로 알려

져 있다. 그러나 박헌영의 정치적

기반은 북이 아니라 남이었다.

당시 북은 소련에 낙점받은 김일성

이 장악을 하고 있었다. 


박헌영은 자신의 입지를 위해서 김일

성에게 남침을 하면 남로당 당원 20만

명이 호응을 하고 봉기를 일으켜 자신

들을 도울 것이라고 주장했다.

박헌영은 김일성에게 숙청달할 두려움

과 이승만 대통령에게 억압받고 있는

남쪽의 남로당원들을 이용해 정치적

으로 재기하기 위해 김일성에게 남침

을 설득한 것이다.


그러나 남쪽 상황은 이승만 대통령이

공산당을 거의 궤멸한 상황이고,

여순반란사태로 인해서 군도 우파쪽

으로  만들어 놓은 상황이었다.


박헌영은 김일성에게 남침3일만에

남로당의 호응으로 남한이 무너질 것

이라고 주장했고, 김일성은 결국 남침

을 감행한다. 6.25 남침이다. 

실제로 북한은 서울을 점령한 뒤 3일

간 진격을 멈췄다. 그러나 박헌영이

말한 민중봉기는 없었다....

이후 부산까지 밀고 내려온 북한군은

맥아더 장군의 그 유명한 인천상륙

작전으로 인해서 혼비백산 무너졌고,

한미연합군이 통일을 하기 직전

중공군의 인해전술로 인해서 

다시 평양을 내주고, 36선까지 후퇴

하게 된 것이다...


박헌영은 전쟁 후, 김일성에 의해

숙청을 당해 비참하게 생을 마감했다.


조선공산당의 아버지인 박헌영의

인생을 보면, 정말 무책임하기 짝이

없다. 자신의 정치적 신념을 위해서

대중을 선동하고, 이용하는 짓을

계속해서 했다. 

박헌영은 남한이 정치적 기반이었으나

그의 조국은 소련과 북한이었다.


해방이후 좌우 대립이 2018년 가을

재현될 조짐이 보이고 있다.

역사는 돌고 도는 것이다.

좌든 우든 한 쪽이 궤멸될때 까지

그 싸움은 멈추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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